볕드는 창

에 의해 admin, 10 9월, 2025

이번엔 진짜로 아팠다. 느닷없이 홍역이 나를 찾아왔다. 무려 8일을 결석했다.홍역은 바람을 쐬면 절대 안 된다며 어머니는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오게 하고 요강까지 주셨다. 요강에 앉은 내 허벅지에 빨간 땡땡이 원단처럼 열꽃이 가득 피었다.결석이 닷새가 넘어가니 몸이 비틀리기 시작했다. 좀 어지럽더라도 일어나 돌아다니고 싶었다. 어머니는 무리하지 말고 그냥 쉬라고 하시는데 너무나 놀고 싶고 밖이 그리웠다. 창호지 문틈으로 조금 내다보이는 마당을 훔쳐보며 마음을 삭였다.“혁주는 수두도 옆구리에 살짝 앓고 말았는데 혁미는 왜 그리

에 의해 admin, 2 9월, 2025

아직도 남아 있는 1학년 ‘통지표’에 적힌 내 키와 몸무게를 바라다본다. 신체검사 날 잰 수치이다. 키 106cm. 겨우 1m 남짓. 참 작았다.신체검사 날 나는 오줌을 쌌다. 언제가 쉬는 시간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. 종일 신체 계측만 하라고 종도 안 울린 건지, 나는 대체 언제 종이 울리나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. 앉은 채 나무 의자를 앞뒤로 흔들며 최대한 참아 보려 애썼다. 의자 다리가 마룻바닥에 부딪혀 달그닥 달그닥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.아,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. 울음보와 함께 나는 그만 오줌을 싸고 말았다.“흐

에 의해 admin, 24 8월, 2025

선생님은 등교 첫 날 남자 1줄, 여자 1줄 키 순서대로 줄을 세우더니, 그대로 남자와 여자가 짝이 되게 앉히셨다. 그리고 우리는 1주일에 1줄씩 옆으로 자리를 옮겨, 한 주는 남자 짝, 한 주는 여자 짝이 되었다.짝이 되는 아이 중에 민귀가 있었다. 항상 코를 흘리고 줄창 카키색 코듀로이 점퍼만 입고 다니고 말수도 적었지만 착한 애였다. 민귀는 한글을 깨치고 오지 못해 ‘바른생활'(국어) 시간마다 애를 먹었다. 선생님은 칠판에 공들여 분필로 판서를 하신 후 한 사람씩 나오게 해서 지시봉으로 짚어가며 판서를 읽게 했다. 그러니 글을

에 의해 admin, 18 8월, 2025

학교에 입학해 무얼 배우는 일과는 재미있었다. 하지만 예민했던 나는 시간 시간마다 긴장을 했다. 선생님이 누구를 야단치신다거나 발을 탕 구르신다거나 바른 자세를 만들고 눈을 감게 하신다거나 하는 사소한 것들이 나는 무서웠다. 이번에는 선생님이 어느 번호를 지목하실까, 대답을 못하면 어쩌나, 발표할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.“엄마, 나 배가 아픈 것 같아요. 학교 오늘 못 가겠어요.”“엄마, 머리가 아파요. 학교 오늘 못 가겠어요.”“글쎄다. 열은 없는 것 같은데.”어머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옷을 다 챙겨 입히고 가방까지 챙겨

에 의해 admin, 11 8월, 2025

학교에서 쓰는 모든 종이는 갱지 또는 시험지라고 하여 A4짜리 누런 용지였다. 그리고 선생님들이 직접 손으로 작성한 가정통신문도 그 누런 용지에 복사하여 하교할 때 나누어 주곤 했다.어느 주였던가. ‘관지’라는 준비물이 쓰여 있었다.“아빠, 관지가 뭐에요?”“글쎄다.”아버지는 주인댁 아저씨께도 여쭤보고 주변에 물어볼 사람에겐 다 물어보셨다. 어머니도 정아 어머니를 찾아가 관지라 나왔는데 이게 대체 뭐냐고 같이 고민하셨다.아버지는 집에 있는 베개만큼이나 두꺼운 국어대사전을 펴셨다.“없는데. 관지가 뭐지?”결국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

에 의해 admin, 4 8월, 2025

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자, 서울로 출근하며 지하상가 옷가게 점원 일을 시작하셨다. 그러면서 동대문이나 남대문 상가에서 좋은 아동복을 구해다 우리를 때깔 예쁘게 입히는데 재미를 붙이셨다. 그래서 입학 몇 주 전부터 나의 초등학교 입학식 옷은 말끔히 준비되어 있었다.입학식을 며칠 앞두고, 아버지께서 학교 가서 사진을 찍자며 내 손을 잡아 끄셨다. 날도 춥고 낯선 곳 가는 것도 싫은데 부득불 찍어 주시겠다는 거다. 손수 장만하신 카메라도 사용해 보고 싶고, 또 어머니가 구해 온 옷 중에 빨간 코트가 예쁘다고 생각하신 듯하다.

에 의해 admin, 28 7월, 2025

초등학교 입학을 1년 앞두고 어머니가 나와 같은 나이라며 친구를 소개시켜 주셨다. 그 아이가 바로 정아였다. 나처럼 위로 오빠도 있다고 했다. 아직 학교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, 우리는 스스로를 ‘빵학년’이라 불렀다. 정아는 그렇게 해서 매일 아침 먹고 나면 우리 집 앞에 와서 “혁미야~, 노올자~!”를 외쳤다. 나는 정아를 통해 동네의 다른 아이들도 소개 받고 많은 놀이를 배웠다. 고무줄놀이를 비롯하여 사방치기, 돈가스 같은 놀이를 나는 빵학년이 되서야 배웠다. 나는 잘 따라가지를 못했다. 그래서 아이들은 나를 늘 ‘깍두기’ 시켜주

에 의해 admin, 22 7월, 2025

나의 친정어머니는 위로 오빠 넷을 둔 막내딸이었다. 막내요, 딸이므로, 또한 우리 어머니의 표정을 보고는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랐으리라 넘겨 짚는 분들이 없지 않았다. 허나 외할아버지는 친정어머니가 3살 때 요절하셨다. 과부가 된 외할머니는 자식들을 먹이느라 장사에 손을 대셨으므로 막내 딸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. 달거리가 시작되었을 때 어머니는 홀로 장에 나가서 개지미 감을 해다 건사를 했다. 치마가 짧아져서 다른 천을 덧붙여 이어 입고 다녔으므로 ‘윗 치마랑 아랫 치마랑 색깔이 다르냐, 너는 색동저고리가 아니라 색동 치마냐’고 놀

에 의해 admin, 17 7월, 2025

아래채에 들어와 살라며 우물을 파 준 고마움도 고마움이었거니와, 주인댁 아주머니와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연대는 끈끈했다. 아버지가 장손이라는 이유로, 또한 6남매 중 가장 먼저 서울 근교로 왔다는 이유로, 둘째 삼촌도 막내 삼촌도 고모도 일자리를 찾아 아버지 어머니에게 임시 거처할 곳을 부탁했다. 그리하여 주인댁 건넌방에서 형제가 같이 신세를 지는 나날이 생겼다.문간방에 살았을 때는 그 때대로, 아래채에 살 때면 또 그런대로 어머니는 집이며 대문간을 자기 집처럼 반들반들 유지 하셨다. 눈이 온 날이면 솔선하여 대문간을 깨끗이 쓸었다

에 의해 admin, 8 7월, 2025

문간방에는 우리 가족이 이사 나갔던 사이, 다른 식구들이 세 들어와 살고 있었다. 그 작은 방에 5명이나 되었다.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4남매 가족이었다.할머니는 지병과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셨다. 아랫목에 크고 높은 평상을 두고 할머니는 온종일 그 위에 요를 깔고 누워 생활하셨다. 지금 생각해 보면 옛 과학실 책상이 아니었나 싶다. 평상 밑에 큰오빠, 막내오빠가 자고, 그 옆에 작은언니, 가장 윗목에 큰언니가 잤다.언니오빠와 할머니는 모두 머리카락과 눈썹과 눈이 새카맸다. 나는 종종 놀러가 평상 밑에 들어가 노래도 부르고, 옛날이